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문단 편집) ==== 점차 강성해지는 오스만 ==== 한편 동로마 제국의 처지는 더욱 악화되어 영토라고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만이 남게 됐다. 또한 1371년에는 [[로마 황제]]가 오스만 베이 [[무라트 1세]]의 신하가 되는 사상 초유의 굴욕까지 맛보게 된다.[* 이 관계는 동로마 황제 [[마누일 2세]]가 오스만에게 저항함으로써 깨어진다. 당시 오스만의 술탄이었던 [[바예지트 1세]]는 오스만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동로마를 비롯한 신하국들을 빡빡하게 대했는데, 제 아무리 오스만이 강력하다고는 해도 마누일의 입장에서는 '이건 정말 아니다'였던 것.] 더욱이 1396년에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헝가리 왕국|헝가리]]가 주축이 된 십자군을 오스만군이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격파한 뒤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보스포루스 해협에 아나돌루 히사리(Anadolu Hisari)라는 요새를 세우는 등 동로마 제국을 압박했던 바예지트 1세는 1402년의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히면서 동로마와 오스만의 관계는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든다.[* [[세르비아 공국|세르비아]] 기병들은 [[티무르]]에게 [[항복]]하기는커녕 마지막까지 분전했다. 오히려 오스만 술탄국에게 일시적으로 멸망당했던 튀르크계 소국들이 등을 돌렸고, 티무르는 당시의 세르비아 통치자인 슈테판 라자레비치 휘하 세르비아 기병대의 활약에 대해 '마치 사자처럼 싸웠다'고 칭찬했다.] 이후 [[메흐메트 1세]]가 10년에 걸친 내전 끝에 왕위 경쟁자였던 형제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오스만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후 그는 [[바예지트 1세]]와는 대조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취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에서는 현상 유지 정책을 펴는 한편 앙카라 전투 이후 독립해 나간 [[세르비아 공국|세르비아]] 등을 다시 신하국으로 삼았다. 그 뒤를 이은 [[무라트 2세]]는 오스만의 세력을 바예지트 1세 때로 되돌려 놓기는 했지만 [[알바니아]]의 군주인 [[스컨데르베우]][* [[영어]]식으로 스칸데르베그라고도 한다. 본래 지방 영주였으나 알바니아의 모든 귀족들을 한데 모아 '레즈헤 동맹'을 결성하고, 오스만에게 25년 동안이나 저항했다. 오늘날에는 단 한 번도 한데 뭉친 적이 없던 [[알바니아]]를 잠시 동안이나마 하나의 깃발 아래에 모은 업적이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알바니아에서는 [[알바니아인|알바니아 민족]]의 정체성 그 자체로 추앙받는다.]와 [[헝가리 왕국|헝가리]]의 유능한 지휘관이자 정치가인 [[야노슈 후냐디]]의 저항에 부딪혔다. 결국 그는 헝가리-[[폴란드 왕국|폴란드]] 동맹[* 당시 헝가리 왕 울라슬로 1세는 폴란드 왕 [[브와디스와프 3세]]의 헝가리식 이름이다. 울라슬로는 바르나에서 전사했다.]과의 전쟁에서 희생만 클 뿐 성과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아들인 [[메흐메트 2세]]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당시 메흐메트의 나이가 어린 탓에 관료들과 군부의 불만에 부딪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린애가 술탄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헝가리와 [[폴란드 왕국|폴란드]]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왔다. 이에 메흐메트 2세는 아버지에게 적을 격퇴해 달라고 요청했고, 무라트는 1444년의 [[바르나 전투]]에서 승리한 뒤 아들을 폐위하고 복위한다. 이후 무라트는 1448년의 2차 [[코소보 전투]] 등에서 헝가리군을 연파하여 강화를 맺었다. 그 뒤 알바니아 원정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한 뒤 곧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아들인 메흐메트 2세가 복위했다. 하지만 복위했을 당시 메흐메트 2세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정했다. 이는 무라트 2세 시대에 오스만 술탄국의 정계에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본래 오스만은 창건자 [[오스만 1세]] 개인의 세력으로 일구어 낸 것이 아니라 여러 튀르크계 부족들의 연합 정권이었다. 그로 인해 초창기 오스만의 지배층은 이들 [[튀르크|튀르크계]] 부족들의 후예들이었다. [[예니체리]]가 창설된 것도 군사적으로 이들의 영향력을 덜 받기 위한 술탄들의 노력이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다고 판단한 무라트 2세는 기독교도 소년들을 징집하여 관료로도 부리자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무라트 2세 치세, 그리고 메흐메트 2세의 치세가 시작되었을 당시 오스만 술탄국의 관료층은 기득권 세력과 [[데브시르메]] 징집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현 상황을 유지하자는 파(기득권 세력)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파(데브시르메)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무라트 2세의 신임을 받던 재상 할릴 파샤는 기득권 세력. 그것도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할릴 파샤는 작금의 오스만 궁정 내 첨예한 정치적 판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겪으면 권력의 중심이 자신이 대표하는 아나톨리아 기반의 [[베이#s-2]](bey)들과 대립하는 기독교 피정복민, 즉 루멜리아 출신의 데브시르메파 쪽으로 넘어갈 것이라 생각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을 반대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